우리는 흔히 제네바를 스위스의 한 지역으로만 알고 있습니다만 역사상 제네바는 온전한 주권 지대였던 적이 더 길게 이어집니다. 그래서 예컨대 "스위스의 칼뱅" 같은 표현보다는, 이름 앞에 "제네바의" 같은 수식어를 널리 붙이는 겁니다. 이런 흔적은 현대에까지도 깊이 남았기에, 예컨대 이십여 년 전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로버트 갈루치 대표가 북측과 맺은 "제네바 핵 합의" 같은 게, 그저 양측이 문서에 싸인을 한 공간 배경으로서의 도시 이름만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각국이 제네바에 파견한 대표부는 그 자체가 중추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외교 기관인 것입니다. "... 그러나 제네바가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을 받아들였다고 모든 과업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교회 안에 개신교적 신앙을 체계적으로 세워야 하며, 교회의 조직도 확립해야 했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츠빙글리라는 종교 개혁가가 초기 단계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해 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단명하지만 않았어도 개신교 신학계는 칼뱅보다 훨씬 큰 비중으로 그를 현창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여튼 역사에 "만약"이란 없는 법이어서, 장 칼뱅은 그 불후의 명성을 프로테스탄트 전반에 널리 떨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런 사정은 크게 변하지 않을 듯합니다.이 책의 서문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 ... 저명한 칼뱅 전문가인 두메르그(E. Doumergue)는 칼뱅을 진실로 완전하게 알고 그의 사상, 성격과 인격을 알기 위해서는, 한 자료가 아니라 세 가지 자료, 즉 그의 강요와 설교집, 그리고 서간들을 참고해야 한다 고 했다..." 과연 그래서인지 요즘은 부쩍 칼뱅의 전 면모를 알기 위한 저술, 번역이 널리 행해집니다. 과거에도 "기독교 강요"는 좋은 번역이 종종 이뤄졌으나, 요즘은 그의 서한집, 또 이 책처럼 본격 논문집이 줄을 이어 번역, 출간되고, 그 외 칼뱅의 심오한 사상을 집중 분석한 좋은 읽을거리가 끊임없이 서점에 나옵니다. 해외에서 구태여 원서를 주문하지 않아도, 한국에서 우리말로 된 책들을 이처럼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건 분명 축복입니다. 중세를 붕괴시킨 양대 추동력이 바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입니다(혹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그리 배웠더랬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종교개혁의 두 기둥이었던 루터와 칼뱅 모두,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해서는 심각한 회의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마르틴 루터만 해도, 재기 넘치는 인문학자 에라스무스(말하자면 "르네상스"의 한 대변자 격인)에 대해 그의 자유의지론을 신랄하게 통박한 바 있습니다. 종교라는 맹목의 도구로 자유혼을 압살해 온 시대에 감연히 저항한 두 흐름을 나란히 거론하기엔, 이처럼 그 근본 스탠스라 불려 마땅한 "자유의지"에 대해 놀랍게도 두 거인이 거의 공통으로 경계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는 중세 가톨릭의 기반을 무너뜨린 거대한 흐름이라는 점에서 동맹군이지만, 그 사상적 기반은 이처럼이나 서로 달랐다는 뜻입니다. 또 후자는, 로마 가톨릭과 너무나 많은 국면에서 협력했고, 때로는 그에 시녀처럼 봉사했다는 게...그렇다고 "자유의지=가톨릭 vs 신의 절대적 예정=개신교"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도 아닙니다. 감리교만 해도 인간의 주제척 선택을 매우 강조하며, 가톨릭 안에서도 예컨대 도미니크회 같은 곳이 섭리로서의 "예정, 구원"에 큰 방점을 찍습니다. 하나 분명한 건, 어느 쪽이든 이른바 "광신, 맹목"이 마치 신앙의 열혈, 정수인 양 오도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어처구니없게, 어떤 특정 주장과 이념이 그 근본에서부터 무엇을 주장하는지도 모르고, 제 멋대로 왜곡, 과장하여 조직 내 자신의 취약한 입지를 강화하려는 아주 비천하고 비굴한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데 악용되는 경우가 흔히 목격됩니다. 이런 악습은, "경거망동=극단과격=충성"이란 극히 잘못된 비틀린 심리의 산물이라 하겠습니다. 원 편역자는 John Kelman Sutherland Reid라는 스코틀랜드 분입니다. 17년 전에 타계했고 향년 구십이 넘게 장수한 신학자입니다. 칼뱅의 저서야 당연히 라틴어, 프랑스어 등으로 저술되었으며, 이분이 이를 영어로 옮겼다는 뜻입니다. 스코트랜드의 장로회가 칼뱅의 후예들 사이에서 차지하는 각별한 위상은 어제 20기 2주차 서평에서 언급한 적 있고, 그 장로회가 잉글랜드의 동지들과 긴밀히 협력하여 이룬 청교도들이 바로 오늘날 미합중국의 "파운딩 파더"들이며, 다시 그 후예인 언더우드(연세대의 설립자이기도 한) 등이 구한말 조선에 건너와 프로테스탄트의 씨를 뿌린 이들이라는 점도 말입니다. 이 덕에 한국에서는 유독 칼뱅의 정통 후계인 장로회가 큰 세를 떨치고 있는 것입니다.한국어 번역은 황정욱, 박경수 두 분 신학박사님이 맡았는데 학부는 서울대를 나오고 석박사는 한신대, 장신대, 독일 부퍼탈, 미 프린스턴 등에서 마친 인재들입니다. 역시 한국 기독교에서는 이쪽 루트를 최고로 쳐주는 듯합니다. 초기 선교사들 중 프린스턴을 나온 분은 찰스 헨리 프랫 같은 분이 유명하고, 한위렴(윌리엄 헌트)나 이후 김재준 목사 같은 훌륭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칼뱅은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 개혁의 신학적 체계를 세운 인물로, 「기독교 강요」라는 불멸의 저작을 남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저명한 칼뱅 전문가인 두메르그(E. Doumergue)는 칼뱅을 진실로 완전하게 알고 그의 사상, 성격과 인격을 알기 위해서는, 한 자료가 아니라 세 가지 자료, 즉 그의 강요와 설교집, 그리고 서간들을 참고해야 한다 고 했다. 그런데 「기독교고전총서」의 제18권인 「칼뱅: 신학 논문들」(Calvin: Theological Treatises)를 편역한 레이드(J.K.S. Reid)는 두메르그의 이러한 주장도 균형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설교집과 편지들 외에도 칼뱅이 저술한 수많은 논문들이 있기 때문이다.
칼뱅이 사역했던 제네바 지역은 이미 츠빙글리의 개혁으로 개신교를 받아들인 곳이었다. 그러나 제네바가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을 받아들였다고 모든 과업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교회 안에 개신교적 신앙을 체계적으로 세워야 하며, 교회의 조직도 확립해야 했다. 이를 위해 칼뱅이 1536년과 1537년에 제네바 시 의회에 각각 제출한 문서가 「제네바 신앙고백」과 「제네바 교회와 예배 조직에 관한 논제들」이다. 그러나 1538년 칼뱅이 제네바에서 쫓겨나면서 그가 의도했던 바를 시행할 수 없었다. 1541년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 칼뱅은 그가 이미 제출했던 문서와 상당 부분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제네바 교회 교리 문답」과 「제네바 교회 헌법」을 제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칼뱅의 신학 논문들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제네바 교회를 종교 개혁의 정신 위에 든든히 세워나가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실제적으로 펼쳤는지, 곧 목회자로서의 칼뱅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제1부 성명 황정욱 옮김
제네바 신앙고백 (1536)
로잔 논제들과 이에 관한 두 개의 연설 (1536)
제네바 교회와 예배 조직에 관한 논제들 (1537)
제네바 교회 헌법 초안 (1541)
시골 교회 시찰을 위한 규정 초안 (1546)
시골 교회 감사에 관한 규정 (1547)
제네바 교회 교리문답 (154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만찬에 대한 소논문 (1541)
성만찬에 관한 신앙고백 (1537)
말씀과 성례전의 사역에 관한 교리 촬요
예정에 관한 논제들
제2부 변증 박경수 옮김
교회 개혁의 필요성 (1543)
제3부 논쟁 박경수 옮김
사돌레토에게 보내는 답신 (1539)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건전한 교리의 분명한 해설 (1561)
일치를 얻기 위한 최선의 방법
어떤 무익한 자의 중상 비방을 반박하는 짤막한 답변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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